10/1 미스터 션샤인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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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떠오르는 단어의 수와 속도가 현격하게 줄어들면서였다. 글을 시작해도 마무리를 짓지 못하는 일이 잦아지자, 아예 글을 시작하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글을 쓰고 싶은 순간은 꽤 빈번하게 다가온다. 재미있는 것은 이성적인 일보다 감성적인 일에 글쓰기의 원의가 솟구친다는 사실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심장이 시킨 일에 두뇌를 쓴다는 사실이고...
이 드라마의 제목은 미스터 션샤인이다. 그리 어려운 단어가 아닌데 미스터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을 굿모닝 션샤인? 아닌데... 굿바이 션샤인? 아닌데... 그거 뭐였지? 션샤인? 아 미스터 션샤인...을 무수히 반복했다. 그의 이름이 미스터 션샤인 일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을 아는 것도 머리이고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머리이니 이또한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대개의 경우, 제목은 극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다. 김은숙 작가처럼 작은 소재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여 소재 간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스타일에게는 큰 뜻 없는 단어의 조합으로 제목을 짓는 일이 훨씬 더 감내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극이 끝나고 나서 사람들이 아... 그래서... 미스터 션샤인이구나... 해야 성이 찰 것.
미스터 션샤인은 유진 초이를 말한다. 유진 초이가 극의 중심인물인가? 그렇다. 그러나 유진 초이가 스스로를 미스터 션샤인이라 부르는 것은 아니다. 그럼 누가 유진 초이를 두고 미스터 션샤인이라 칭하는가? 고애신. 그녀이다. 조부는 고종의 스승이자 존경받는 선비, 친부모는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죽음을 당한다. 태평성대였다면 행복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춘 그녀였을 것이나 운명은 그녀를 어둠으로 내몰았다. 그녀는 총을 들고 어둠 속을 헤치는 스나이퍼. 그러나 어둠이 없었다면 빛이 밝은지도 몰랐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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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긍정적, 부정적인 프레임을 씌워 이미지화 하는 이유로 긍정적 이미지를 갖는 단어들은 종종 비슷한 선상에 놓이곤 하는데 사실 균형은 정의와 동일선상에 있는 단어가 아니다. 균형은 정의일수도, 부정의일수도 있지만 동시에 정의가 아닐 수도, 부정의가 아닐 수도 있다. 사회는 항상 균형을 추구하는데 그 균형은 선악의 개념이 아니다.
조선은 유교 질서가 지배하는 국가였다. 유교 질서 아래에서 오랜 시간동안 나름의 균형이 존재하는 국가였고 그 균형을 놓고 21세기에 가치 판단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판단이 아닌 이해가 필요한 대목. 어떤 균형이든 한 번 흔들리면 새로운 균형을 찾을 때까지 사회는 혼란을 맞는다. 모든 새로운 균형은 기존의 질서와의 결별을 주창하나 그 말 조차 '기존의 질서'라는 표현에서 시작한다. 즉 새로운 균형은 기존의 질서와 새로운 시대를 모두 포함한 말인 것이다.
고애신은 단순한 여인이 아니다. 구시대의 주도층인 양가집 사람인 동시에, 구시대였으면 조용히 난이나 쳤을 계집의 신분이다. 시대가 크게 요동치자 그녀는 구시대와 새시대, 주류와 비주류를 동시에 품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된다. 김희성, 유진초이, 구동매는 저마다의 이유로 새시대를 열기 적합하지 않은 인물들이다. 김희성은 새로운 균형을 위해 제거되어야 하는 주류 of 주류 중 하나이며 유진초이와 구동매는 살기 위해 국가를 등질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을 갖고 있으니 구시대의 균형을 흔들 수는 있되, 새시대를 열기 위한 대중의 공감을 받기는 어렵다.
고사홍, 황은산, 쿠도 히나 모두 마찬가지. 이유는 조금씩 다르지만 기존의 질서와 새로운 시대를 모두 포함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인물들이다. 애초에 고애신은 독보적인 인물이다. 주류이나 주류이지 않고 약하나 약하지 않은 인물. 브레이브 하트를 보라. 프리덤은 윌리엄 왈레스(맬 깁슨)이 외치지만, 그의 사후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이뤄내는 것은 로버트 1세였다.
극중 고애신이 갖는 의미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극중에서 고애신이 불리는 이름이 애기씨인데 여기에서 씨는 씨앗의 씨가 아니고 氏이다. 여기에서 氏는 친절한 금자씨의 씨가 아니다. 현대의 氏는 뭔가 낮춰부르는 느낌이 있지만 옛날 氏는 높임말이었다. 인터넷에서 '님'에 대한 뜻이 기존의 높임말에서 조금씩 까대는 말로 변질되고 있는데 氏 또한 시대를 거치며 그 의미가 변질되었다. 즉, 아가씨를 요즘 말로 하면 아기님, 높은 분이 되실 아기라 하겠다.
즉 고애신은 새로운 시대를 의미함과 동시에 지금은 망해없어지지만 언젠가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날 조국을 의미한다. 혹자는 고애신 일병 구하기 아니냐고 비아냥 대지만, 고애신은 일병이 아니라 조국 자체이다. 고애신이 죽으면 모두 끝인데 모두가 고애신을 구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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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 관점에서 구동매와 유진초이가 보이는 고애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 또한 조국에 대한 애정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가장 대표적으로 천대받고 괄시받던 계급 출신이다. 구동매는 백정, 유진초이는 노비 출신인데 둘 다 자신을 버린 조국을 등지고 천신만고 끝에 미국, 일본이라는 다른 나라의 옷을 입고 조국에 돌아온 인물들이다. 다른 나라의 옷을 입고 나 또한 조국을 버렸다고 생각했으나 고애신을 마주한 순간, 자신들이 얼마나 고애신, 즉 조국의 사랑을 갈구했는지 알게 된다.
과거에 그랬듯, 현재에도, 미래에도 그 사랑을 받을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알면서도 그 사랑을 향해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임을 깨닫고 새 옷을 벗어던지는 이들. 이제 그들은 애신에 대한 사랑을 숨기지 않는다. 무언가를 이뤄내는 것, 이뤄내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내가 가야 하는 길, 그 길이 나의 운명임을 각자 깨달아 가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찾아가는 과정, 그것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부르지...
원래 조국(고애신)을 지켜오던 고사홍은 스스로 자신을 지키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나, 그조차 여의치 않음을 깨닫고 미국의 옷을 입은 유진초이와 일본의 옷을 입은 구동매에게 조국을 부탁하고 눈을 감는다. 유진초이는 '이건 나의 히스토리이자 나의 러브스토리'라고 말하며 죽음으로 자신을 내던진다. 그것이 바로 유진초이의 운명.
조국은 그들이 최유진, 구동매, 이양화였던 시절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저 '복에 겨운 양반 계집애' 였을 뿐었다. 하지만 조국이 모르는 긴 세월동안 그들은 최유진, 구동매, 이양화로 태어났고 최유진, 구동매, 이양화인채 조국에게 버림받았으며 유진초이, 이시다 쇼, 쿠도 히나가 되자 조국의 관심을 다시 받게된 것이다.
그들은 조국을 등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조국으로부터 진정 듣고 싶어했던 이름은 최유진, 구동매, 이양화였다. 구동매를 이시다 쇼로 부른 사람들은 구동매의 칼에 죽음을 면치 못했고 쿠도 히나 또한 마지막에는 이양화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그리고 마침내 총에 맞고 멀어지는 유진초이에게 조국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다.
최~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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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션샤인.
우리말로 하면 빛 선생 정도될까? 미스터는 호칭이니 빛 정도 되겠다. 빛이 의미하는 건 절망보다는 희망이겠지. 깊은 어둠 중에 있는 조국, 고애신의 관점에서 가장 갈구하는 것은 빛과 희망이다. 그러나 그 희망의 빛이 어느 곳에 있는지 조국은 스스로 알지 못한다. 초가 불을 밝히려면 자기 몸을 태워야 하는데 조국은 자기 몸을 태워 불을 밝히라 지시하지도 않은채 빛을 찾고 찾고 또 찾는다. 그것은 역사의 운명은 빛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
그러니 초가 알아서 자기의 몸을 태워 불을 밝힐 수 밖에... 그렇게 스스로를 태우는 이들이 모이고 모여 빛이 된다. 이름 없이 자기자신을 태운 이들을 가리켜 의병이라 하니 이 드라마는 결국 의병에 대한 드라마이다. 빛 선생, 빛 씨 자체가 의병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결국 미스터 션샤인은 이름이 있으되, 그 이름으로 불리지도 못 했고 그 이름으로 불리지도 못했던 상황에서도 자신의 몸을 태워 조국을 지키고자 했던 의병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가 불리고자 했던 이름은 미스터 션샤인이 아니라 최유진이었고 그의 죽음은 슬프지만 받아들여야 할 초의 운명이었음을 감안하면 그의 죽음을 통해 조국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으니 미스터 션샤인은 결국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