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견해

진리

CICCIT 2019. 5. 28. 16:39

우리 각자는 다들 자기 삶 속에 삽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알고 있는 진리가 남이 생각하고 있는 진리에 우선한다고 무의식 중에 생각하게 되죠. 

그런데 그런 부분을 경계하고 내가 아는 진리가 별 게 아니고 겸손하게 바라보려는 노력을 하다보면 나 자신은 한없이 부족한 존재이고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진리와는 다르게 돌아가기도 한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운 진리를 깨닫게 된 이후에는 나와 주장이 다른 사람을 만났을때 '나도 예전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다가 아니더라. 다른 진리가 또 있더라'하고 생각하거나 말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의 진리만이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 겸허허게 자신을 성찰하고 수행한 끝에 너가 모르는 나의 진리가 있다는 도덕적 우월감이 생긴 셈이죠. 먼 길을 돌고 돌아왔는데 수행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내 진리만 진리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무엇인가 이해하고 깨달을수록 지적이든, 도덕적이든 어떤 우월감을 갖게 됩니다. 

영화 박쥐에서 송강호는 신의 모든 것을 갈망하는 사제였다가 인간의 모든 욕망을 갈구하는 흡혈귀가 됩니다. 거룩한 사제였던 자기를 추종하는 신자를 강간하려고 하며 성기를 노출하기도 하죠. 영화적 스토리이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표현되었지만 그 표현에 대한 거부감을 내려놓고 다시 보면, 극중에서 자기자신은 인간의 욕망 앞에 아무것도 아닌 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 앞에서 도덕적 우월감을 내려놓는 극단적인 행동을 한 셈이죠. 

 

우리 삶에 있어 선택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선택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또한 가만히 있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부드러운 말이 사랑을 의미하는 것도, 조용한 분위기에서의 평화로운 합의가 반드시 일치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또 부처님은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셨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어떤 이들은 일반적인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선하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사회적 성취가 아닌 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성취에서 찾는 이들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거꾸로 보잘 것 있는(?) 이들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사회적으로 어떤 성취를 이뤄낸 이들에게 '삶은 그게 다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나의 도덕적 우월감이 작용한 결과는 아닐까요? 우월감이 작용할 필요가 없는 중생들을 만났을 때에는 굳이 꺼내어 들 필요가 없는 우월감이 왜 어떤 때에는 내 마음 속에서 불쑥 나와 상대방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걸까요? 왜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너는 가진 게 많은데 왜 사랑하지 못하느냐고 되묻고 왜 그의 말을 재단하고 판단하게 되는 걸까요? 

 

예수님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했지, 보잘 것 있는 이들의 잘못을 판단하고 고쳐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경제적 부나 사회적 성취의 유무, 개인적인 노력과 능력 등의 역량은 아닐 것 같습니다.

 

진정 세상의 것이 아닌 소중한 것을 가슴 속에 갖고 있고 세상적인 것들을 한낱 티끌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상대를 대상으로 나의 깨달음이 맞네, 틀리네를 논할 이유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들 또한 사랑해야 할 하느님의 자녀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랑하고자 하는 원의를 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마음 속에 깊이 들어가 그게 무엇인지 잘 살펴보십시오. 그게 바로 유혹입니다. 그것이 나의 깨달음입니까? 그것이 내 인생을 걸고 찾아낸 나의 진리입니까? 바로 그 진리가, 그 깨달음이 예수님에 더 다가가기 위해 이 순간 끊어야 하는 유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