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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미래

나의견해 / 2018. 3. 19. 17:23

서울의 2020 도시기본계획은 1도심(한양도성), 5부도심(용산, 청량리/왕십리, 상암/수색, 영등포, 강남), 11지역중심(상계, 연신내, 미아, 망우, 신촌, 공덕, 목동, 대림, 사당, 잠실, 천호), 53지구중심이고 2030 서울플랜은 3도심(한양도성, 강남, 영등포/여의도), 7광역중심(용산, 청량리/왕십리, 창동/상계, 상암/수색, 마곡, 가산/대림, 잠실), 12지역중심(동대문, 성수, 망우, 미아, 연신내/불광, 신촌, 마포/공덕, 목동, 봉천, 사당/이수, 수서/문정, 천호/길동)이다. 부도심은 광역중심으로 대체되었고 빨간색으로 표시한 지역들은 위상이 한 등급씩 상승했다.

 

서울은 조선시대부터 600년 도읍이다. 북쪽은 북한산과 남쪽은 남산, 한강으로 둘러쌓인 지역이어서 선택되었고 4대문을 잇는 성곽이 있었다. 도읍이 이 곳이었던 이유로 4대문 밖에도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나라가 인증하는 시장인 시전이 지금의 종로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전국의 모든 물품은 이리로 향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물류가 이동하는 곳곳에는 사람이 몰릴 수 밖에 없었다. 대표적으로 서울에 들어오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했던 4대문 주변과 반드시 건너야 했던 한강 나루터 주변 등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대량으로 물자를 수송할 수 있던 교통수단이 사실상 배뿐이었던 시대였기에 한강진, 영등포, 마포 등 ~나루, ~진, ~포 등이 들어간 곳들은 예로부터 사람과 물자로 붐비던 지역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결국 나라가 세워지고 도읍이 정해지면 그 도읍을 중심으로 물류가 흐르게 되고 그 물류가 흐르는 길을 따라 사람이 붐비게 되며 사람이 붐비는 곳에 다시 시장이 생기고 시장이 생기면 또 물자가 필요해지는 선순환이 반복되며 도시는 발전한다.

 

1960년대 당시 정부는 여러가지 이유로 남서울 개발 계획을 착수하고 이에 따라 허허벌판이었던 영동(영등포 동쪽)에 정부주도형 도시 개발이 시작된다. 행정구역은 서울에 포함되나 사실상 또 하나의 도읍이 생기게 된 것. 영동이 새로운 도읍으로 개발되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배경이 있다. 우선 한강진, 영등포, 마포 등을 새로 개발하기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그들의 이전, 보상, 철거 등이 쉽지 않았고 포화 상태인 도읍의 기능을 나누기에는 지리적으로 너무 가까웠으며 자동차의 발달로 그 외 지역들의 접근성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그리고 이미 땅값이 비싸서 요직 인사들이 해먹기에 수익률이 부족했다.

 

경제 성장과 함께 폭발적인 인구 성장과 도시화의 바람을 타고 남서울 영동은 눈부신 발전을 보이고 여기에 정부는 목동, 상계동에 이어 분당, 일산, 산본, 중동, 평촌의 5대 신도시를 기획, 개발하기에 이르른다. 하지만 이들은 강남 이상의 어마무시한 사람들이 몰린 것과는 별개로 자급자족의 도시를 만드는 데에는 실패하게 되는데 이는 정부의 개발 계획의 차이와 지하철의 발전 때문이 아닐까 한다.

 

지하철 1호선의 첫 개통일은 1974년 8월이고 2호선의 첫 개통일은 1980년 10월인데 1호선은 청량리~서울역, 2호선은 신설동~종합운동장의 구간이었다. 3호선과 4호선이 개통된 것은 1985년이고 2호선도 지금과 같은 모습의 순환선이 된 것은 1984년의 일이다. 종합운동장에서 교대까지 연장되며 테헤란로를 커버하게 된 게 1982년인데 이 때도 역삼동에서 지하철을 타고 도심에 가려면 신설동에 가서 갈아타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명동이 직장이라면 그렇게 빙빙 돌아서 가고도 종로 3가에서 한참을 걸어가던가 다른 버스를 타야 했다. 

 

반포 1단지의 첫 입주가 1973년이고 잠실 주공의 완공이 1976년, 압구정 현대, 서초동 무지개 입주가 1978년, 역삼동 개나리, 대치동 은마 입주가 79년이다. 상대적으로 도심권과 가까웠던 반포와 압구정을 차치하더라도 지하철 2호선이 위치해 있는 강남의 테헤란로와 근접한 대단위 아파트 단지는 이미 80년을 전후하여 형성되었다. 대부분 지하철 2호선의 강남구간이 개통하기도 전이었으며 개통하고도 상당 시간(2호선이 완전 개통되고 3호선, 4호선이 개통된 1985년~86년까지) 동안 지하철을 통한 도심 접근은 쉽지 않았다.

 

실제 직장의 이전과 산업단지의 형성이 없었다면 남서울 신도시는 성공하기 어려웠음은 이후의 신도시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후 대표적 신도시라고 할 수 있는 목동, 상계동, 분당, 일산, 산본, 중동, 평촌은 전형적인 배드타운으로 형성되었고 사람을 모으고 상업시설이 발전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하나의 도읍으로 폭발적인 성공은 보인 강남과 비교하면 큰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더 좋은 성과를 냈던 목동과 분당이 한양 도심과 강남 도심에 대한 접근성이 좋은 지역이라는 사실은 이를 잘 뒷받침한다.

 

이들 신도시는 본격적인 지하철의 발전에 발맞춰 기존 도심에 연계되는 배드타운으로 기획되었고 그에 따라 전형적인 배드타운으로 형성되며 상업지역, 주거지역으로 발전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생산을 위해서는 지옥철을 타고 도심으로 이동해야 하는 배드타운에 머무르고 말았고 이러한 현상은 한양과 강남의 두 도심에 대한 집중도는 오히려 더 높아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앞으로 서울은 어떻게 달라질까? 이 역시 개발 계획과 운송 수단의 변화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피곤해서 오늘은 여기까지)

 

최근 가장 큰 변화는 급행. 급행에 따라 도시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그런데 기존 3도심을 인정해 주겠다네? 용산은 그 가운데에 있네?

Posted by CICC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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